한국전쟁 72주년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 노래를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슬프며 장엄하게인지 음악 선생님께서 그런 느낌으로 부르라고 연습하고 또 연습을 했었다. 이번에 한국전쟁 72주년 을 맞으면서 그날을 돌아보고, 6.25 참전국 및 의료지원국, 재정지원국 등을 정리해 보았다. 태극기를 직접 그리던 생각도 난다.
한국전쟁 72주년
6.25 전쟁 72주년이다. 벌써라는 단어부터 떠오른다. 어렸을 때 동네에는 참전하신 분들이 꽤 많았다. 보통 호칭을 아저씨라고 불렀었는데, 그분들이 참전용사였다니 좀 더 존경심을 갖고 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허긴 나도 어렸을 때니 뛰놀기에 바빴었다.
6.25 전쟁 참전국, 의료지원국, 물자 재정지원국, 지원의사표명국
6.25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라고 해서 노래 운율에 각 국가 이름을 넣어서 외우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흥얼거릴 수 있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 캐나다, 뉴질랜드 / 타이(태국), 벨기에 / 콜롬비아, 그리스 / 네덜란드, 터키 / 프랑스, 룩셈부르크 / 필리핀, 에티오피아 /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렇게 전투부대 파견을 한 참전국 16개국이다. 노래를 배울 당시 에티오피아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라고 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의료지원국(5개국)은 덴마트,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이상 5개 나라이다.
물자 및 재정지원국은 39개국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버마(미얀마), 캄보디아, 칠레,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에콰도르, 이집트,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아이티, 온두라스, 헝가리, 아이슬란드, 인도네시아, 이란, 이스라엘, 자메이카, 일본, 레바논, 라이베리아, 리히텐슈타인, 멕시코, 모나코, 파키스탄,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스위스, 시리아, 우루과이, 바티칸, 베네수엘라, 베트남, 서독 이상 39개국이 물자 및 재정지원을 해줬던 나라이다.
지원 의사 표명국은 볼리비아, 브라질, 니카라과 이렇게 3개국이다.
전투부대를 파견한 참전국 16개 나라, 의료지원국 5개국, 물자 및 재정지원국 39개국, 지원의사표명국 3개국이다. 총 63개국이 6.25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들이다. 지금 사람들이 나라 이름을 듣다 보면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우리나라 경제보다 한참 아래인 나라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1950년대는 우리나라만큼 가난한 나라는 거의 없었을 정도이다.
6.25 노래 가사 변경
6.25 노래를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6.25 노래 가사가 내가 처음 알던 것과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적으로 좌. 우를 가릴 필요는 없지만 언제 변했는지 그동안 무심했었구나 싶은 생각이다.
과거 6.25 노래 1절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절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불의의 역도들을 멧 도적 오랑캐를 /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후렴 :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바뀐 6.25 노래 1절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 나던 날을 / 동포의 가슴에다 총칼을 들이대어 / 핏물 강이 되고 주검 산이 된 날을 2절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동포 형제를 원수로 만든 그들을 / 겨레의 이름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 / 선열의 흘린 피 헛되지 않게 시리 3절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 위해 / 민족의 공적과 싸우고 또 싸워서 / 통일의 그날이 기어이 오게 시리
후렴 : 이제야 이루리 그날의 숙원을 / 동포의 힘 모아 하나의 나라로 / 피의 원한 풀어 하나의 겨레로 / 이제야 이루리 하나라 한겨레
개인의 의견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크게 보면 될 것이다.
1950.6.25~1953.7.27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242대의 탱크와 170대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00여 대의 비행기를 앞세워 거의 무방비 상태의 남한에 전면 침입을 개시했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을 체결하기까지 1,129일간의 전쟁이다. 6.25 전쟁에 대해서는 절대로 정치적 입김이 작용해서는 안된다. 사실 그대로 기록하면 후대가 평가하게 마련인 것이다. 한국전쟁 72주년을 맞이하여 6.26 전쟁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시대 상황을 바른 시각으로 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폭풍이라는 공격명령 와 함께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남한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혀 없었고, 20여 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 락기가 전부였다. 계속 밀리며 마지막인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교착상태였는데,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까지 압록강까지 올랐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연이 많은 1951년 1.4 후퇴가 시작된다. 다시 쫓기어 서울을 빼앗겼다가 다시 회복하고 교착상태로 있다가 휴전협정을 맺게 되며 전쟁이 끝나게 된다.
교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가 일어나고 휴전 협정일 당시에도 전투는 치열했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기해 전 전선 전투중지가 되었다. 가끔 영화나 증언을 통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이날도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6.25 전쟁 3년간 상상도 못 할 인명피해가 났다.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북한국 93만, 중공군 100만, 민간인 250만, 이재민 370만, 전쟁고아 10만, 전쟁미망인 30만, 이산가족 1,000만이었다. 당시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3,000만이었는데, 1,90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원래 공식적인 기록보다 더 많은 피해가 있기 마련이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될 전쟁이다. 동족끼리의 전쟁인 것이다. 국제적인 이익을 따져 입김이 작용한 전쟁이기도 하다.
38선은 지리학적으로 고정된 선이지만 아직까지 휴전선은 유동적이고 인위적으로 그은 선이다. 갈수록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지만 벌써 갈라진 지 72년이 넘었다. 그만큼 이질성이 점점 커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6.25 한국전쟁 당사자들이 흔했지만 지금은 드물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대로 갈라진채 굳혀지면 안 될 일이다. 한국전쟁 72주년을 맞아 생각이 많은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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